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카를 하우스호퍼 (문단 편집) == 생애 == 1869년 [[바이에른 왕국]] [[뮌헨]]에서 태어났으며, 1887년 [[독일 제국]]의 제1야포연대에 입대하여 군인으로서의 생활을 시작하였다. 이후 육군사관학교와 육군대학을 차례로 졸업하고, 1903년부터 같은 학교에서 [[역사]]를 가르치는 [[교수]]로 부임하였다. 이후 1908년부터 1910년까지 일본 주재 독일 대사관에 [[주재무관]]으로 근무하였으며, 1913년 '[[일본 제국|일본]]의 군사력, 세계에서의 지위, 장래에 대한 고찰'이라는 제목의 [[논문]]을 발표하여 [[박사]] [[학위]]를 취득하였다. 이듬해 [[제1차 세계대전]]이 발발하자 그는 [[프랑스]]와 [[벨기에]] 전선에 참전하여 [[소장(계급)|소장]]으로 진급하였다. 1차 대전이 끝난 뒤 그는 [[뮌헨 대학교]]의 교수가 되어 [[지정학]]을 본격적으로 연구하기 시작하였다. 그러던 1919년 하우스호퍼는 [[루돌프 헤스]]와 친분을 쌓게 되었고, 그를 통해 히틀러를 만날 기회를 얻었다. 히틀러는 '생존권을 잃은 독일인은 살아남기 위해 [[레벤스라움|군사적으로 확장 정책]]을 진행해야 한다'라는 하우스호퍼의 사상에 흥미를 가지고 [[나치당]]의 정책에 이를 도입하였다. 1933년 나치가 권력을 장악하자 하우스호퍼는 뮌헨 대학교의 정교수, 외교, 군사 고문, 그리고 독일군 군사참모를 역임하여 [[괴벨스]]와 더불어 나치의 실질적인 2인자 역할을 수행하였다. 1934년부터는 독일 학사원 총장을 맡는 동안 독일 주재 일본대사관의 주재무관이었던 [[오시마 히로시]]와 접촉하여 독일과 일본의 정치적 연합이 만들어지는데 영향을 주었다. 그러나 1939년 [[제2차 세계 대전]]과 [[독소전쟁]]이 발발하자 하우스호퍼는 '지정학적으로 독일은 소련과의 관계를 강화해야 한다.'라고 주장하였고, 결국 히틀러와 서서히 멀어지게 되었다. 이에 더해 아들 알브레히트가 히틀러에 저항하는 지하 운동을 펼치던 중 [[게슈타포]]에게 붙잡혀 처형되는 사건도 발생하였다. 시간이 흘러 1945년 나치 독일의 패망으로 전쟁이 끝나면서 하우스호퍼는 다른 나치 간부들과 함께 1946년 [[연합군]]에게 체포되었다. 이후 [[뉘른베르크 재판]]에서 [[사형]] 선고가 유력해 보이자 옥중에서 아내와 함께 [[비소]]로 자살을 시도하였고, 비소를 먹었음에도 본인은 죽지 않았기에 다시 단검으로 [[할복]]을 하여 생을 마감하였다. 그가 실제로 사형 선고를 받았을 가능성은 희박했다. 나치와 개전에 사상적 토대를 제공하긴 했지만 이것 자체만으로는 범죄라 하기 애매하며, 그 외에 전쟁에 적극적으로 협력한 것도, 반인륜적 범죄를 저지른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. 그리고 하우스호퍼는 아내가 [[유대인]]이었기 때문에 [[반유대주의]]에도 동의하지 않았다. 물론 유죄 판결은 피할 수 없었겠지만. [[분류:1869년 출생]][[분류:1946년 사망]][[분류:제1차 세계 대전/군인]][[분류:제2차 세계 대전/군인]][[분류:독일 제국의 군인]][[분류:독일 국방군/인물]][[분류:제3제국/인물]][[분류:자살한 나치 관련자]][[분류:날붙이에 죽은 인물]][[분류:뮌헨 출신 인물]]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